2022년 4월 16일 세월호 8주기 기억식 열려

승객 476명 중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 172명의 생존자
일반 국민도 트라우마가 생긴 있어서는 안 될 사건

정일관 승인 2022.04.16 22:37 | 최종 수정 2022.04.22 11:21 의견 0
세월호가 거치된 목포신항 / 국립생명기억관이 건립될 예정

안산시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8주기 기억식이 열려 299명이 참석해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또한 세월호가 있는 전남 목포시는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다짐행사인 ‘기억, 책임, 약속’을 지난 9일부터 시작해 오는 4월 30일까지 목포신항, 목포시 일원에서 열어 추모분위기를 이어간다.

시는 추모객의 불편함이 없도록 9개과 3개동 직원을 1일 6명을 세월호가 거치된 목포신항에 배치하고 있으며 추후 국립생명기억관이 건립될 때까지 이같은 관리를 지속할 방침이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476명 중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 172명의 생존자를 남긴 사건이다. 2014년 10월 세월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 ▷화물 과적, 고박 불량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운전 미숙 등이라고 발표했으며 이후 2017년 3월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특별법'이 합의되면서 세월호 선조위가 출범 이에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수색 등이 이뤄졌다.

이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이 탑승했으며 이로인한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세월호는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처음 건조된 여객선으로 한국의 청해진해운이 이 배를 중고로 도입해 6개월 정도의 수리 기간을 거치면서 객실 증설 공사를 진행해 총톤수를 6825t으로 늘렸다.

검경합동수사본부는 세월호의 침몰원인이 화물 과적, 고박 불량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운전 미숙 등이라고 발표했으나 대법원은 2015년 11월 세월호 조타수의 상고심에서 '조타기의 결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침몰의 직접적 원인이 된 급격한 변침이 조타수의 실수인지 조타기의 결함 때문인지를 가르는 중요한 블랙박스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이후 세월호 사고의 원인을 둘러싸고 잠수함 충돌설, 고의 침몰설 등 여러 가지 가설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승객 300여 명을 구조 노력 하지 않고 배에서 탈출해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준석 선장 등 선원 15명은 2014년 5월 재판에 넘겨졌으며 2015년 11월 대법원은 이 선장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선원 14명에게는 징역 1년 6개월~12년형을 선고했다.

아울러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으나 퇴선 유도를 하지 않은 김경일 해경 123정 정장은 2015년 11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됐다.

이는 현장 구조 지휘관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된 첫 사례였으며 당시 빠른 판단으로 퇴선 유도를 했다면 생존자가 조금은 늘어났을거라는 의견이 많았다.


세월호는 사건 1091일 만인 그해 2017년 4월 11일, 세월호 육상 거치 작업을 통해 미수습자 9명을 찾기 위한 수습·수색 체제로의 전환 및 세월호 사고 진상 규명 작업이 진행됐다.

이후 3차례에 걸친 수습·수색 작업을 통해 이전까지 미수습자로 남았던 9명 가운데 4명의 유해를 수습했으며 2018년 10월 19일까지 남은유해 수색을 진행했으나 끝내 5명의 유해가 수습되지 못했다.

세월호 사건은 기본적으로 국회의원들이 사업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안전 관련법을 느슨하게 만들어주면서 증축과 적재화물량을 늘린 데다 거기에 돈을 더 벌겠다고 무리하게 짐을 실었으며 이를 결박 혹은 고박이라고 하는 고정장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급속한 변침에 화물이 쏠리면서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침몰한 사건이다.


전문가라고 믿었던 선장과 선원은 배의 운항에 전문가이지 화물과 승객의 안전과 책임감에 대해서는 배운게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전문적이지 못한 시스템으로 인해 희생자가 더욱 늘어났다.

심지어 구조하러 온 해경도 마찬가지로 해상사고에 대한 경험과 시스템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못해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면서 구조행위를 해 결국 정장이 법적 처벌까지 받았다.

구조구난 시스템에서의 엇박자와 교신 시스템도 엉망이었으며 이후 각 부처마다 대책위를 만들고 국민들의 비난을 피하고 장단 맞추는데 초점을 둔 요식행위로 인해 대한민국의 재난관리 시스템과 전문교육시스템이 얼마나 허접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해경과 선장 선원등 선박 안전관리 교육체계와 책임감에 대한 교육 정도는 진행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았다.


세월호 학생들보다 1살 많은 자녀를 둔 국민 A 씨는 "요즘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 꿈을 꾼다면서 내게는 공부보다도 자식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 사건이지만 그분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사건이었을 것" 이라며 "이후에 물가 근처에 간다고만 하면 드라이백(drybag)에 로프를 매듭지은 생존 공예 어깨끈을 함께 보낸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한민국 시스템이 요식행위로 가득 차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식과 체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면서 "각 직업에 맞는 필요한 능력과 과목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기본적인 능력과 책임감, 도덕성도 함께 교육시키는 방법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세월호 사건의 문제점

[네이버 지식백과] 4·16 세월호 참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세월호 출항 예정시각이었던 2014년 4월 15일 저녁 6시 30분 인천항엔 안개가 자욱해 많은 선박들이 출항을 포기했으나, 세월호만 2시간 30분 늦게 출항했다.

또 세월호는 안전점검표에 차량 150대·화물 657톤을 실었다고 기재했지만, 실제로 실린 화물은 차량 180대·화물 1,157톤으로 무리한 화물을 적재했다.

이와 같은 과적 화물은 세월호가 급격한 변침으로 복원력을 잃은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했다.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 급격한 변침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인해 좌현부터 침몰이 시작됐다. 그러나 침몰 중에도 선내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이 반복됐고, 구조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처럼 세월호 참사는 ▷엉뚱한 교신으로 인한 초기 대응시간 지연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 ▷해경의 소극적 구조와 정부의 뒷북 대처 등 총체적 부실로 최악의 인재(人災)로 이어졌다.


세월호는 급선회로 배에 이상이 생긴 이후, 사고 수역 관할인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아닌 제주 VTS에 최초 신고를 해 초기 대응시간을 허비했다. 더욱이 세월호가 진도 VTS 관할 수역에 4월 16일 오전 7시 7분에 이미 진입해 있었음에도 진도 VTS는 세월호의 관할 해역 진입 사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고를 받고 사고 해역으로 출동한 해경은 여객선 안에 300명 이상의 승객이 남아있음에도 배 밖으로 탈출했거나 눈에 보이는 선체에 있는 승객들만 구조했을 뿐 세월호 내부로는 진입하지 않는 소극적 구조로 일관했다.


허둥댄 정부, 초동 대처 실패
해양수산부는 사고 발생 후 즉시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세우고 범 부처 총괄업무를 시작했으나, 곧 관련 업무를 안전행정부의 중앙재난대책본부(중대본)에 넘겼다.

하지만 중대본은 사고 현장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수차례에 걸쳐 잘못된 정보를 발표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여기에 경기도교육청도 세월호 침몰사고 직후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는 잘못된 공지로 공분을 일으켰다.

여기에 해수부·교육부·해양경찰청 등이 별도의 사고대책본부를 꾸리면서 사고 관련 대책본부만 10여 개에 달했다. 총리실은 중구난방이 된 대책본부를 통합해 정홍원 전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를 수립해 관련 업무를 총괄하겠다고 발표했다가 하루 만에 철회했고, 결국 해수부장관이 다시 범부처 사고대책본부의 장을 맡게 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하면서 구조 작업은 더뎌졌다.

이처럼 세월호 침몰사고 발생 직후 초동 대처부터 허둥댔던 정부의 무능과 혼선 등 허술한 재난대응시스템이 세월호 참사에서 여실히 노출되면서 정부 책임론에 대한 비난과 질타가 쏟아졌다.

뒤늦은 구조 작업 돌입
세월호가 선수를 제외하고 사실상 완전히 침몰된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정도였는데, 세월호 실종자 수색을 위해 잠수요원이 본격적으로 투입된 것은 사고가 난 지 8시간이 지난 4월 16일 오후 5시 정도였다.

특히 사고 발생 첫날인 4월 16일은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았지만, 처음 수백 명의 구조요원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바와 달리 수중수색은 3차에 걸쳐 16명이 투입되는 데 그쳤다.

또 세월호는 사고 초기 선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졌지만 3분의 2 이상이 해상에 떠있는 상태를 상당 시간 유지하고 있어 이 시기 구조장비의 빠른 투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선체 부양을 위한 리프트백 투입은 4월 18일에야 이뤄졌고, 야간구조작업을 위한 오징어잡이 어선은 침몰 나흘째, 잠수부들의 이동을 돕는 대형바지선은 침몰 5일째인 4월 20일에야 뒤늦게 투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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